[비지니스코리아=정민희 기자] 진료는 의사에게, 약은 약사에게. 1999년 의약분업·의료파업 사태를 기억하고 있는 이라면 어렵지 않게 떠올릴 수 있는 문구다. 당시 제도의 시행을 둘러싸고 의료파업 등의 갖은 사회적 혼란을 빚은 바 있는 의약분업은, 질 높은 의료 서비스를 목적으로 의약의 합리화와 약품 남용 방지를 위한 취지로 도입되었다. 현재는 그 취지를 인정받아 우리 사회에 안정적인 시스템으로 자리하고 있다.

그런데 최근, 이 오래된 문구가 다시 수면 위로 떠오르고 있다. 보건복지부가「국민건강보험법」의 장애인보조기기에 대한 보험급여 기준에 의한 「장애인보조기기 보험급여 기준 등 세부사항」의 일부 개정안을 2020년 6월 3일 행정예고를 하면서다.

보청기는 소리를 증폭하여 손실된 청력을 보조, 의사소통을 돕는 보조기기다. 청력검사 결과 난청으로 판정이 되면 보청기 착용을 권장하고 있으며 청각장애가 인정 되는 경우 국가에서 「국민건강보험법」에 의거, 보청기 구입비용의 일부를 지원 받을 수 있다. 이때 보청기 보조금 지원을 받기 위해서는 구입처가 국민건강보험공단에 보청기 판매 업소로 등록이 되어 있어야 한다.

논란이 되는 것은 이번 「장애인보조기기 보험급여 기준 등 세부사항」개정안에 포함된 ‘보청기 판매업소 기준’이다. 한국청능사협회 권순관 회장에 따르면 지난 해 말(2019년 11월 14일) ‘보청기급여제도 개선 공청회’ 때에는 없던 판매업소 기준이 이번 행정예고에서 새롭게 추가 되었다. 바로 판매인력 기준에 이비인후과 전문의를 포함한 것이다.

의료인인 이비인후과 전문의를 판매인력으로 등록하는 것은 안과에서 안경을 판매하거나 의약품을 판매하는 것과 같다. 이 개정에 따르면 앞으로 보청기의 처방과 검수, 그리고 판매까지 의사가 모든 것을 독단으로 결정할 수 있게 된다.

현행법상 청각장애인이 보청기 급여 지급을 받기 위해서는 병원에서 보청기 처방을 받은 후 보장구 판매업소에서 보청기를 구입하고, 착용 한 달 후 의사의 검수를 받는다. 이는 보청기 효과를 보다 객관적으로 확인하기 위한 절차이다. 하지만 6월 3일 행정예고 등록기준을 따르게 된다면 추후에는 판매자가 본인이 판매한 제품의 효과를 검수하는 모순이 발생하게 되는 것이다. 급여에 대한 부정수급이 발생할 경우 이를 통제할 방법이 없어지는 것은 물론 의약분업화 시대를 역행하는 처사라 할 수 있다.

보청기는 처방과 판매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적합과정 등의 사후관리가 중요한 의료 보조기기다. 치료가 불가능한 난청인을 위한 재활보조기기의 개념이기 때문에 의사의 개입이 필요 없는 보청기 전문가의 영역이다. 보청기에 대한 전문성은 물론이고 많은 시간과 노력을 요구하는 분야로 제품 선정을 위한 상담에만 1시간 이상이 걸리며, 평균 사용기간 5년 동안 최소 20회 이상 방문하여 음질 최적화 과정을 수행해야 한다. “전문의는 질환의 진단, 치료, 예방이 주 업무이기 때문에 많은 시간을 요하는 보청기의 적합서비스를 담당하기에는 시간적, 공간적 조건이 보청기적합 서비스 업무에 적합하지 않다”는 것이 권회장의 설명이다.

또한 권회장은 이번 행정예고 내용대로 개정이 될 경우, 이비인후과 전문의가 진단-보청기 판매-검수 확인에 이르는 보청기 급여의 모든 과정을 독단으로 처리할 수 있어 부정수급을 모니터링 하기 어려워 질 수 있다고 밝혔다. 더불어 지금의 보청기 급여제도에서 판매자가 검수확인의 업무를 담당하는 등 불합리한 점이 많으므로 보건복지부가 이번 고시를 철회하여 난청인이 피해를 입지 않도록 할 것을 주장하였다.

현재「장애인보조기기 보험급여 기준 등 세부사항」행정예고의 대대적 보완을 촉구하는 청와대 국민청원이 이어지고 있는 상황이다. 탁상행정임을 비판하는 목소리가 커지며 업계의 큰 반발이 예고되고 있는 상황이다. 애초 「장애인보조기기 보험급여 기준 등 세부사항」개정은 보청기 보조금 부정수급 방지와 난청인에게 질 높은 청각 서비스 제공을 목적에 두고 있다. 보청기 판매와 적합을 의사에게 맡기는 것이 누구를 위한 개정인지를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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